겨울여행에는 유행이나 시류를 거스르는 묘미가 있다. 겨울 동안에는 아예 문을 닫아버리는 명소도 있고, 아무리 유명한 장소도 막상 겨울에 가면 관광객이 거의 없어 스산하고 휑뎅그렁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유럽은 겨울에 해가 일찍 지기에 오후 3시만 되면 벌써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곳도 많다. 가끔은 눈 속에 고립되어 한동안 나오지 못할 위험도 있다. 캐나다에서는 거의 허리 위까지 차오르는 거대한 눈더미를 헤치며 씩씩하게 걸어다닌 적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겨울여행이 좋다. 사람을 더욱 씩씩하고 용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겨울에는 쉽
왜 이렇게 모든 것들이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러우며 어여쁠까. 핀란드의 헬싱키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느낀 도시의 인상이었다. 헬싱키의 항구와 곧바로 연결된 시장 좌판에 놓인 체리와 블루베리들, 걸거리의 평범한 카페 입구에 놓인 화분 하나하나, 인테리어 소품을 파는 자그마한 가게의 소품들, 그 어느 것도 예쁘지 않은 것이 없었다.그들은 단지 팔기 위해 상품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상품’ 하나하나를 ‘소중한 존재’로 쓰다듬고 돌보는 듯 보였다. 무심코 놓인 듯한 자전거 한 대, 노천카페의 테이블 위에
천재 피아니스트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영화 ‘샤인’의 실제 주인공으로 알려진 데이비드 헬프갓. 그의 인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안녕 데이비드’에서 이런 대사를 만났다. “세상에는 외톨이가 필요해요. 세상엔 똑같은 장단에 맞장구치지 않는 사람이 필요하지요. 보다 독창적이고 덜 겸손하며 규율이나 규칙에 너무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이요.” 이렇게 멋진 말을 한 사람은 바로 데이비드를 진찰한 정신과 의사였다. 데이비드는 언뜻 보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아 보인다. 마치 6살쯤에서 정신적 성장이 멈춰버린 것처럼, ‘어른스러움’이나 ‘절제’ 같은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여행이 있다. 위대한 예술가의 발자취를 따라 떠나는 여행이 바로 그것이다. 예술가가 태어난 고향, 그가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작곡하거나 글을 쓴 장소들, 그가 사랑에 빠지거나 가족을 일구거나 인생의 전환점을 발견한 장소들, 그가 세상의 풍파를 견디며 자기만의 내면세계를 가꾸어나가고, 텃밭이나 정원을 일구며 생의 찰나성과 예술의 영원성을 사유하던 곳들. 그 모든 ‘예술사적 사건’의 장소를 탐험하는 여행은 아무리 떠나고 또 떠나도 질리지가 않는다.그런 여행은 필연적으로 ‘공부’를 요구한다. 하지만 그 공부란
체 게바라, 어니스트 헤밍웨이, 피델 카스트로, 그리고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 쿠바를 직접 가보지 않고도 쿠바를 저절로 떠올리게 하는 뜨거운 상징들은 정말 많다. 어쩌면 ‘쿠바의 현재’보다도 ‘쿠바의 과거’야말로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싶은 여행의 이상향이었는지도 모른다. 쿠바의 현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지만, 쿠바의 과거에 대해서는 귀동냥이 참 많았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뿐 아니라 쿠바의 다양한 음악들을 틈날 때마다 찾아 듣곤 했고, ‘체 게바라 평전’이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거나 관람했으
[image1]오래전 웅장한 건축물과 위대한 미술작품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된 나의 여행은 점점 ‘실내공간에서 실외공간으로’ 관심의 초점이 이동하고 있다. 정원, 공원, 그리고 숲을 향한 매혹은 인공의 예술 작품이나 화려한 건축물에 대한 불타는 호기심보다 훨씬 잔잔하고 여유롭게 찾아왔다. 느긋함이나 ‘쉬엄쉬엄’이라는 느낌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나에게 정원과 공원, 그리고 숲과 산은 오직 자연만이 줄 수 있는 마음의 평화를 가르쳐주었다. 특히 과거에는 개인의 사적 공간이었지만 현재는 누구나 방문할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한 예술가
이야기의 첫 장면을 읽는 순간, ‘이곳에 꼭 가고 싶다’는 생각을 품어 안게 하는 장소들이 있다. ‘피터팬’의 네버랜드 같은 상상의 장소는 물론, ‘맥베스’의 배경이 된 황량한 스코틀랜드의 평원, ‘레미제라블’에서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지는 그때 그 시절의 파리까지. 그런 장소들은 지상에 존재하지 않거나, 이제는 ‘그때 그 시간의 그 장소’와는 너무 달라져버린 곳이다.그런데 소설 속의 장소와 실제 장소가 그리 많이 변하지 않은 곳도 있다. 바로 ‘폭풍의 언덕’의 배경이 된 영국의 하워스 같은 곳이다. 물론 그 시절과 똑같을 순
[image1]그곳으로 가는 길 자체가 한 편의 오롯한 이야기가 되는 장소가 있다. 나에겐 덴마크 코펜하겐이 그랬다. 유레일 패스를 끊어 기차를 타는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기차시간표만 검색하여 함부르크에서 코펜하겐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무거운 짐을 기차에 내려놓자 금세 잠이 쏟아졌다. 뮌헨, 베를린, 드레스덴 등 독일의 5개 도시를 쉬지 않고 돌아다닌 뒤라 피로가 몰려왔다. 한참 졸고 있는데 희미하게 독일어와 영어 안내방송이 차례로 들려왔다. 앞부분은 자느라 못 듣고, 뒷부분만 들렸다. “우리 열차는 곧 페리 안으로 들어갈 예정입
[image1]여행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기분 좋아지던 때가 있었다. 아직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이 없던 시절, 나는 혼자 떠난 첫 번째 유럽여행에서 깨알 같은 글자들이 빼곡히 적힌 소책자를 늘 휴대하고 다녔다. 기차로 왕복할 수 있는 유럽 모든 도시의 운행 스케줄표였다. 바로 유레일 시간표였다. 틈만 나면 그 기차시간표를 펼쳐 들고 ‘다음에는 어떤 도시로 갈까’ 하는 설렘을 만끽하곤 했다.지금은 유레일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하지만, 앱으로 검색하는 행위에는 ‘뚜렷한 목적지’가 필요한 반면 이리저리 책을 들춰보는 아날로그 시간표는 ‘목적
영화 ‘비긴 어게인’을 보면서 길거리의 소음조차 자연스러운 음악으로 어우러지게 만드는 예술가들의 열정에 매료되었다. 그들은 길거리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 자동차 소리, 그리고 온갖 잡스러운 소리들이 섞여 만들어내는 도시의 온갖 소음 자체를 자신들의 음악과 어우러지게 만들었다. 어쩌면 모든 소음이 철저히 통제된 녹음실의 음악은 완벽하게 살균된 음식처럼 생명력을 잃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나는 ‘버스킹(Busking)’이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본질적인 소란스러움을 사랑한다. 소리란 본래 소란스러움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무거운 침묵
떠나기 전에는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가 다녀온 뒤에는 ‘왜 이 도시를 이제야 갔을까’라고 후회하게 만드는 곳들이 있다. 예컨대 알프스를 품어 안은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나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이 그런 곳이었다. 도시 구석구석 숨은 매력이 많은 곳은 다시 또 찾아가도 새로운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프랑스 남부의 항구도시 마르세유는 꼭 한 번 다시 가고 싶은 도시다. ‘왜 진작 가지 않았을까’ 하고 뒤늦게 후회하게 된 도시, 좀 더 일찍 가지 못해 안타까운 도시이기도 하다. ‘다음에 가자, 시간 많을 때 여유 있게 가지 뭐!’라고 차
1950년대 미국의 도서관에서는 유례없는 ‘책의 학살’이 감행되고 있었다. 새로운 지식의 탄생을 억압하는 과거의 분서갱유(焚書坑儒)식 말살작업이 아니라 책의 미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진행된 책의 학살이었기에 더욱 기가 막힌 일이었다. 당시 도서관 사서들은 책의 모서리를 두세 번 이중으로 접어본 뒤, 만약 종이가 찢어지면 ‘이 책은 21세기가 오기 전에 부스러질 것이다’라고 결론을 짓고, 도서관에서 해당 종이책을 없애고 마이크로필름으로 대체했다.예일대학교에서는 무려 130만권의 책이 이렇게 ‘이중접기 테스트’에 불합격했다는 이유로 서
나의 ‘피렌체 앓이’가 언제쯤 시작되었나 하고 뒤돌아보니, 1995년 샌드라 블록 주연의 영화 ‘당신이 잠든 사이에’를 봤을 때부터였다. 그 영화 속에는 피렌체의 실제 모습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주인공 루시는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기차역 역무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가족도 없이 쓸쓸하게 혼자 살아가는 그녀의 유일한 희망은 아직 한 번도 스탬프가 찍히지 않은 여권이었다. 항상 ‘피렌체로 여행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한 번도 여권에 도장을 찍지 못하고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묵묵히 일을 하고 있는 루시에게 잭은 피렌체의 두오모성
나는 가슴 아픈 질문을 던지는 소설에 매혹된다. 설령 그 질문이 전혀 내 취향은 아닐지라도.‘사람들의 만남이란 한밤중에 아무런 생각 없이 달려가는 두 기차가 서로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지속성과 신뢰감과 친밀한 이해심을 보이는 이 모든 것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속임수는 아닐까?’파스칼 메르시에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한 대목이다. 나는 인간관계를 이렇게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싶지가 않다. 내 마음은 이런 비극적 인식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 질문이 던지는 파문은 오래오래 가슴
“나는 너를 몰라. 하지만 너를 원해.(I don’t know you. But I want you.)”- 영화 ‘원스(Once)’ 중에서잊을 수 없는 영화 속 한 장면. 연인이 떠나버리고 홀로 남아 아이를 키우는 한 여자는 음악이 너무 듣고 싶어 시디플레이어를 재생하려 하지만 건전지가 없다. 건전지를 살 돈조차 없어 딸아이의 저금통을 몰래 털어 가게로 향한다. 얼빠진 표정으로 건전지를 허겁지겁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녀는 ‘내 아이의 저금통을 몰래 털었다’는 죄책감조차 잠시 잊은 채 마치 구원의 열쇠를 들고 천국의 대문을 열
겨울여행에는 물론 그 나름의 낭만도 있지만 혹독한 추위와 함께 ‘문 닫은 곳’이 많다는 단점이 있다. 특히 영국의 겨울은 혹독하다. 추위보다도 너무 적은 일조량이 문제다. 오후 3시만 되어도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고, 슬슬 문을 닫는 상점들이 많다. 2014년 12월에 떠나 2015년 2월에 돌아온 영국 여행에서는 ‘갈 수 있는 곳’보다는 ‘갈 수 없는 곳’이 더 많을 정도였다. 케임브리지에서는 겨울비가 내려 일찍 문을 닫은 상점들이 태반이었고, 로빈후드의 고향인 노팅엄에서는 기대했던 ‘로빈후드 투어’가 겨울에는 진행되지 않는다는 이
세상 사람 모두가 ‘셰익스피어가 좋다’라고 말한다면, 이 세상에서 전쟁은 사라질 것입니다.- 오다시마 유시, ‘내게 셰익스피어가 찾아왔다’ 중에서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아닌 여왕의 숨겨진 연인 윌리엄 드 비어가 셰익스피어 작품의 진짜 숨은 작가라고 주장하는 영화 ‘위대한 비밀(Anonymous)’에는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익명의 작가에게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선물받아 기뻐하는 여왕 앞에서, 신하는 경멸의 눈초리로 이렇게 말한다. “희곡은 악마가 만들어낸 더럽고 천박하고 야비한 우상 숭배이자 이단이다.” 그러나 여왕 폐하는 그 말을 무
유럽 여행을 향한 내 꿈의 불씨를 댕긴 첫 번째 여행은 유럽 박물관 기행이었다. 당시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김영나 교수님의 인솔로 석박사과정 학생들과 화가들이 함께 박물관 기행을 떠났는데, 나는 그 그룹에서 유일한 ‘비전공자’였다. 모두가 미술사 전공자이거나 화가였는데 나만 국문과 대학원생이었다. 나는 명백한 이방인이었기에 내 ‘무지’를 들키지 않으려고 엄청나게 애를 썼지만, 박물관에 간 첫날 들통이 나고 말았다. 피카소의 도자기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재미있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질문을 하고 말았다. “피카
여행 초보자일 때는 런던, 파리, 뉴욕, 베를린 등 이름만 들어도 왠지 설레는 대도시가 좋았다. 영화나 소설을 통해 상상만 하던 그 모든 것들을 눈으로 확인하는 즐거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뉴욕의 뮤지컬, 파리의 루브르미술관, 런던의 웨스트민스터사원, 베를린 필하모니 등등은 그곳을 여행하기 전부터 이미 우리가 ‘듣고 보고 알고 있는 것들’의 보물창고였다. 그러니 그 여행은 새로운 발견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의 재확인일 때가 많았다.그래도 짜릿했다. 내가 진짜로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기보다는 남들이 좋다고 해서 가보고 싶은 곳인 경우가
‘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을 출간한 이후 가장 자주 받는 질문 중 하나가 바로 ‘어느 나라의 어떤 음식이 맛있는가?’였다. 그때마다 나는 ‘포르투갈 음식, 스페인 음식, 또 의외로 맛있는 독일 음식’ 등을 이야기하곤 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아무리 오랫동안 여행을 다녀도 우리나라 음식이 제일 맛있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평생 입맛은 두세 살 이전에 결정된다’는 속설이 나에겐 정말 딱 맞아떨어진다. ‘어디서든 현지에 적응하자’는 다짐으로 튜브형 고추장이나 컵라면조차도 가져가지 않았지만, 귀국해서 가장 먼저 찾는 것